'찰나'에 해당되는 글 150

  1. 2009.01.10 오늘 2
  2. 2008.12.21 벼랑 위의 포뇨 4
  3. 2008.12.11 요즘 2
  4. 2008.10.13 이도 저도 아닌 마음 6
  5. 2008.10.08 2008 독서 리스트 2
  6. 2008.08.24 어느새, 가을 2
  7. 2008.08.18 -
  8. 2008.08.13 - 2
  9. 2008.08.05 문학
  10. 2008.08.05 공항

오늘

정말 오랜만에 소설을 써보겠다고 노트북을 짊어지고 도서관에 갔다.
무겁다고 투덜대며 도서관으로 향하는데,
왔다갔다 시간만 낭비할 뿐 소득 없이 돌아오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모락모락.

이럴 때 나는 나를 너무 잘 아는 것 같기도 하다.
도착하자마자 계간지에 실린 소설들을 읽어대다가 배도 고프지 않은데 매점에 내려가 컵라면을 해치우고
그리고도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서야 놋북 부팅.
엄한 한글 화면만 주구장창 째려보다 돌아왔다.
쓰려고 하는 맘이 중요한 거다, 시작이 반이다, 이런 알량한 말들을 중얼거리며 도서관을 나오는데
놋북은 왜 이렇게 무거운 것이며 날씨는 또 왜 이다지도 춥단 말인가.

쓴다는 것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것일까.
어쩌면 나는 키보드를 두르려대는 행위만을 동경하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이달에 한편 쓰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인데, 과연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실은 지인과의 약속이다)
단순한 자기 만족일지라도 완성해서 고치고 또 고치고 싶다.
오늘부터 소설쓰는 밤의 시작이다.
건필!


+
사모해 마지않는 김연수 님의 이상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려온다.
괜히 내가 설레는 이유는 뭐지? 왜 내가 뿌듯한 것이냐.
모쪼록 앞으로도 좋은 작품 기대하는 바이다.
좋은 작가와 좋은 작품은 존재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벼랑 위의 포뇨



따뜻한 이야기가 필요했더랬다. 의자에 몸을 한껏 깊숙이 파묻고 심각하지 않은 마음으로 볼 영화가 필요했다.

사람이 되고 싶은 물고기 포뇨에게 인간 세계는 그저 신기하기만 한 세상이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따뜻하고 유쾌하다는 것.
기본적으로 애니매이션이라는 장르가 아이들의 시선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해도,
이 영화 참 유쾌하고 기분이 좋다. 뭔가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을 단순하다는 말로 오해하지는 마시길.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동경이라고 하기에 포뇨의 눈망울은 너무 맑다.
좋아하는 친구 앞에서 "포뇨 소스케 좋아" 라고 반복해서 외치는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지금 잃고 있는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포뇨는 걱정이 없다. 심각하지 않다.
오히려 걱정하고 심각해하고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어른들이다.
아이들은 눈 앞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고 그것을 나름의 방법으로 소화시킨다.
그것이 소스케가 돌아오지 못 하는 아빠에게 서툰 불빛 신호(?)로 건네는 단순하지만 실은 가장 중요한 말이든,
엄마를 찾아 가는데 필요한 배를 크게 만드는 포뇨의 마법이든,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포뇨의 아빠는 금기를 쥐고 접근하지 못하게 하지만 포뇨에겐 그런 것 쯤 별 것 아니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 하나. 자신 역시 사랑을 위해 사람이기를 포기한 장본인이면서 왜 포뇨가 인간이 되기를 막는 것일까? 그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인가? ;;)
마을에 쓰나미가 오건 말건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파도 위를 뛰어다니는 포뇨를 보고 있노라면
아 어떻게 하지, 저러면 안되는데, 큰일나는데, 따위의 근심들은 금세 별 것 아닌 게 되고 만다.
아, 저 천진한 꼬마를 어쩌면 좋아!
인어공주는 인간이 되고 싶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하지만 포뇨는 다르다.
사랑한다면, 한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이 희생하는 방법을 택할 게 아니라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함께 행복한 것이 옳은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래서 포뇨는 아빠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껏 소스케에게 간다.
누구도 거기에 왜,라는 질문을 달지 않는다. 고개를 갸우뚱거리지도 않는다.
자신이 물고기 포뇨라는 걸 알아보는 소스케와,
폭우 속에서 뜬금없이 나타나 원래 물고기였다고 말하는 포뇨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소스케 엄마의 행동은
그래서 더욱 따듯하다.
소스케와 포뇨는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길을 간다.
장난감배를 크게 만드는 것은 포뇨의 마술이지만,
마술이 풀렸을 때 포뇨의 손을 잡고 안아주는 건 소스케다.
사람이 되어 소스케 옆에 있고 싶다고 바다를 건너 온 것은 포뇨이지만,
그런 포뇨의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는 건 소스케다.
그들은 그렇게 타의가 아닌 자의로 삶을 선택하고
그래서 포뇨는 인간이 된다.
그 시작이 비록 소스케의 피가 포뇨의 몸에 흐르게 되었기 때문이라도,
소스케로 하여금 포뇨를 지켜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한 것은 포뇨가 아닌가.
소스케는 포뇨가 인간이든 물고기이든 상관없다.
처음 포뇨를 만난 날 물고기 포뇨를 보며 함께 울고 웃었던 소스케가 아니던가.
상대의 상황 따위 전혀 상관없는 소스케에게 포뇨의 엄마가 묻는 물음은 그래서 참 헛헛하면서도,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라는 생각에 싸한 마음이 되었다.
영화는 포뇨가 인간이 된 이후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행복하든 행복하지 않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행복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건가?
어쩌면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는 걸, 우리는 너무 오래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던 비극적 스토리의 주인공인 인어공주는 없다.
자신의 식대로 행복을 찾고 결국은 그 행복의 주인공이 된(혹은 될) 귀여운 포뇨가 있을 뿐이다.


+
저 멀리 바닷가에서 아빠와 소스케가 불빛으로 나누는 대화.
그리고 토라진 엄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스케가 던지는 한 마디에 그만 눈물이 나고 말았다.
아 너무 따뜻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해피엔딩이라 좋다.
역시 나는 해피엔딩을 선호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보다.
(지극히 가벼워진 스토리에 기존 미야자키 하야오 팬들에겐 조금 실망일지도^^)


                                                                                                                             사진 출처 : 네이버 무비 '벼랑 위의 포뇨'

요즘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다시 읽고 있다.
읽으면서 마음의 결을 달라지게 했던 순간들과 느낌들을 남기고 싶은데
막상 또 먹먹해지고 만다.
꽤 오래 됐다, 이런 상태.
읽긴 읽지만 남기지 않고, 그러다 보니 점점 더 무언가를 쓴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영화를 봐도 책을 읽어도,
살아가는 순간 순간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그 무엇을 느껴도.
짐짓 혹은 애써 모른척하고 있다.
내가 느끼는 게 맞는 걸까.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답도 없는 건데 무에 그리 어렵다고
이러면 정말 곤란한데. 이러다 정말 한 글자도 못 쓰게 되는 건 아닐까하는 두려움.
조금씩이라도 느낌을 생각을 갈무리해 놓는 연습을 해야겠다.
그러다 보면 진짜 내 이야기를 쓰는 날도 오겠지.
좀 전에 봤던 드라마 '메리대구공반전'에서 대구가 말했는데.
"한 페이지일지언정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다"고.
부끄럽다.

새로울 것도 없지만 한 해가 끝나간다 생각하니 부쩍 울적해지는 횟수가 늘고 있다.
슬프되 상심에 이러지 말자.

1월엔 그리운 친구가 돌아온다.

좀 더 어른스럽고 담담한 얼굴로 그녀를 만나길 기다리며,
괜히 센치해져서 몇 자 끄적여본다.

이도 저도 아닌 마음

엄마가 퇴원을 하셨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억울하고 아팠던 것이야 말로 다 할 수도 없고
말로 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 이제 그 타령은 그만 접어두기로 하자.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하자.
이제 남은 것은 퇴원 후 진행될 일에 대한 꼼꼼한 마무리와
엄마의 쾌유. 그리고 피폐해진 스스로를 다독이고 정리하는 것.

일년이 송두리 째 지나간 것 같다.
남들이 보면 별 일 아닌 일일지 몰라도 내게는 너무 벅차고, 힘든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일이 될지 모르지만(교통사고, 이제 나에게 물어보시라 -_-)
지금 당장은 그저 맥없이 멍할 뿐이다.
아무리 이만하길 다행이다 다독이지만 그것은 한낫 말일 뿐 결국 나는 이렇게 힘들다 힘들다 갖은 엄살을 피고 있다.

어쨌든,
엄마가 퇴원 하셨다.
자잘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그 사실만으로도 한시름 놓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엄마가 미역국에 밥을 말아 주셨는데
아 정말 밥알 둥둥 뜬 미역국에 눈물 양념 칠 뻔 했다.

많이 배우고 많이 힘들고 많이 느꼈던 시간이었다.
보험사를 상대하며 안그래도 심약한 성격이 도를 지나쳐
문구 하나에도 벌벌 떨며 하루 종일 고민하는 소심함의 극치를 달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어찌하랴. 성격이 그런 것을.

지금 나는 너무 멍하다.
한 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애를 태운 것이 억울하다.
누가 뺏어간 것도 아닌데,
시간은 그냥 저 흐르는 대로 흘렀을 뿐인데,

나는 내 그 소중한 시간을 도둑맞은 기분이다.
아주 더럽고, 그래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화가 난다.
서럽다.
철퍼덕 주저앉아 어린애처럼 두 다리 뻗대며 엉엉, 울고 싶다.
누가 뭐라고 했나? 누가 나보고 너 왜 그정도 밖에 못했니, 질책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런데도 지금 나는 누군가를 붙잡고 변명이든, 푸념이든, 그러고 싶은 거다.


어른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나보다. 




2008 독서 리스트

마시멜로 두번 째 이야기 - 호아킴 데 포사다
감기- 윤성희
바람의 화원 1, 2 - 이정명
럭키의 죽음 - 이재웅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집 - 미우라 시온
채식주의자 - 한강
즐거운 나의 집 - 공지영
끌림 - 이병률
공중그네 - 오쿠다 히데오
유쾌한 하녀 마리사 - 천명관
마흔의 심리학 - 이경수, 김진세
여행할 권리 - 김연수
서랍속 카메라 세상을 만나다 - 채동우
랄랄라 하우스 - 김영하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친절한 복희씨 - 박완서
악기들의 도서관 - 김중혁
한밤중에 행진 - 오쿠다 히데오
퀴즈쇼 - 김영하
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 김혜남
인더풀 - 오쿠다 히데오
와세다 1.5평 청춘기 - 다카노 히데유키
내 아들의 연인 - 정미경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김연수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 - 박주영
평균대 비행 - 조정현
풍선 - 정이현
사랑하거나 미치거나 - 권지예
목소리의 무늬 - 황인숙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 에쿠니 가오리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밤은 노래한다 - 김연수
달의 바다 - 정한아
엄마를 부탁해 - 신경숙
분홍 리본의 시절 - 권여선
달을 먹다 - 박진규



+ 올해 읽은 책들, 양도 적지만 그나마도 정말 편중돼 있구나.

어느새, 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어느새, 가을이다.

시간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더니 그 말이 맞긴 맞나보다.

계절에 민감해지고, 그것에 몸이, 아니 그보다 마음이 먼저 반응한다.

요즘들어 마음이 많이 약해졌음을 느낀다.

어느때고 글썽이는 마음, 요즘 내가 그렇다.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들, 얼굴 보고 안부를 묻고 싶지만 쉽지가 않다.

이제는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도 서툴러져, 반의 반도 표현해내지를 못한다.

이 아릿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이럴 때는 말이란, 혹은 글이란 얼마나 무력한가 기운이 빠진다.



쓸쓸하다고 말하기엔 뭔가 미진한, 알싸한 밤.

-

이래도, 이래도, 하며 삶은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툭툭 던져 놓는다. 뾰족한 방법 같은 건 없다. 그저 앞으로 걸어갈 뿐이다. 꽃 핀 길이라고 멈출 수도, 얼음판이라고 건너뛸 수도 없다.

- 정미경 '들소' 中

문학

  지난 백년 동안 수없이 많은 동양인 이민자들이 그렇게 젖은 눈으로 금문교를 바라봤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금문교에는 수많은 이민자들의 목소리가 숨어 있다. 귀를 기울이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문학은 그런 목소리를 외부로 드러내는 작업이다. 정치적으로 봤을 때,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존재가 그 목소리로 증명된다. 반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들, 즉 입술이 없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대신해서 말한다는 점에서 문학은 본디부터 정치적이다. 금문교를 바라보면서 나는 문학이란 그들을 대신해 소리를 내어줌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입증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금문교가 있는 한, 누군가는 이민자들의 언어로 그들의 삶을 드러낼 것이다.
  치카노 문학이라는 것 역시 그런 식으로 형성됐을 것이다. 버클리에서 문학행위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까닭 역시 여기에는 아직도 말을 빼앗긴 존재들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한국에는 이제 더이상 말을 빼앗긴 존재가 없다는 뜻일까? 금문교를 바라보면 그런 의문이 자꾸든다.

<중략>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쓰게 될 때 우리가 쓸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혹시 한국에서 자꾸만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까닭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문학이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쓸 수 있을 때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써야만 하지 않을까?

- 김연수, <여행할 권리> 中



*
문학이란, 문학이란, 문학이란.....
킬킬대며 웃다가 멈칫, 마음이 숙연해지는,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는, 읽었던 문장을 다시 한번 꼼꼼히 되짚어 보게 되는 김연수의 수필집.

*
오랜만에 꽤 괜찮은 책을 만난 듯하여 배가 부르다.

공항

  여권에는 나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만 기재돼 있다. 이름과 국적과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 직장에서의 평판은 어떤지, 가족들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따위는 불필요하다. 초등학교 시절의 장래희망이나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가격 등도 필요없다. 출생증명서에 생물학적 사실관계를 밝히는 숫자만 기재돼 있는 것처럼 여권에도 오직 생물학적인 '나'에 대해서만 적혀 있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느 시공간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최소한의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우화처럼 느껴진다. 거기에는 치명적인 진실이 있다. 공항을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는 그저 여권에 적혀 있는 생물학적인 존재,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비행기를 타고 우리가 어디에 도착하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란 존재는 이름과 국적과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에 불과하다. 그 이상의 것들, 그러니까 사회적인 '나'는 등뒤에서 닫히는 출국장의 문 그 너머에 남겨져 있다.

-중략-

  두말할 나위 없이 삶은 영원하다. 다만 우리를 스쳐갈 뿐이다. 출국심사대에세 이제 드디어 내가 나 자신으로 돌아간다고, 그리하여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고 생각했다면, 입국심사대를 빠져나오면서부터는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느끼게 된다. 입국장의 문이 열리면 거기 수많은 사람들이 귀국하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친지이거나 친구이거나 동료들이다. 그들은 그저 저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누구인지 일깨워준다. 그들은 여행자를 찾는 순간, 미소를 짓거나 웃음을 터뜨린다. 극적으로 만나게 되어 눈물을 흘리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웃음으로 마무리된다.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가족을 보며 화를 내거나 우울증에 빠지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 혹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였던 나는 곧 그 사이의 어떤 것으로 바뀐다. 그 어떤 것은 공항을 빠져나가 바로 집으로 돌아간다. 늘 먹던 반찬으로 밥을 먹고 나면 거기가 집임을 실감할 것이다. 공항에 들어서기 전까지 일어났던 일들은 마치 꿈처럼 느껴진다. 그때는 완전히 타지사람이었고 여행자였다. 공항은 마치 생을 바꾸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며칠, 혹은 몇달이 지난 뒤에 우연히 여권을 보게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여권에 기재된 바로 그 사람이었을 때는 언제였을까. 물론 타지를 떠돌 때였다. 그럼 집에 있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영원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만간 그는 다시 공항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질문하고, 그리고 그 질문의 해답을 찾아 여행할 수 있을 뿐이다. 공항에서 우화는 반복된다. 결국 우리는 무례한 타지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덧없이 반복되는 존재일 뿐이다. 공황의 우화에 주제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리라.

  - 김연수, <여행할 권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