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에 해당되는 글 7

  1. 2019.11.12 오랜만에
  2. 2012.07.23 지지 않는다는 말 4
  3. 2009.11.23 - 4
  4. 2009.07.07 - 2
  5. 2008.08.05 문학
  6. 2008.08.05 공항
  7. 2008.07.10 상심에 이러지 말자 9

오랜만에

얼마만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랜만에 무언가 남기고 싶어 다시 돌아왔다.

하루가 한 달이 일 년이 어찌가는지도 모른채 관성처럼 살아가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브로콜리너마저가 여의도에 온다는 소식에 점심을 건너뛰고 가서 가을볕 아래 꿈인가 싶은 표정으로 어깨를 흔들흔들했던 그런 순간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분명히 있다. 그게 중요한 건데 그럼에도 자꾸 잊는다.

사모해마지않는 김연수 작가의 수필집 <시절일기>를 머리맡에 두고 자주 뒤적이고 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가 오래 시선을 주다가 덮었다가 한다. 곁을 내어주고픈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뜬금없이 말하고 싶은 마음이다.
여름의 끝자락에서부터 가을이 짙어지는 내내 기회가 되면 작가를 만나러 다녔다. 그 공간에서의 시간들이 나를 잠시 괜찮게 했음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같은 시절을 살고 있음에 고맙고 또 안심이 되는 사모해마지않는 김연수 작가가 오래도록 글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나쁜 일은 글쓰기로 사라진다고 작가가 말했는데, 나는 아직도 쓰지를 못하겠다. 서성이는 걸까. 언제까지 서성이기만 할 것인지. 그럴거면 쓸쓸해지지나 말것이지.

지지 않는다는 말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 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中

 

 

 

 

이건 뭐, 졌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 요즘,

내게 가장 위로가 되었던.

-

  그러다가 장마가 찾아왔고, 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달리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으며 장마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아마도 나나가 아니라 그녀에게, 그것도 문자 메시지가 아니라 전화를 건 까닭은 어쩌면 장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우리는 날씨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차라리 쏟아져 내리면 그나마 마음이라도 흡족할 것을, 내리는 둥 마는 둥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장마에 대해서, 균질하게 하늘을 가득 메운 무미건조한 회색에 대해서, 뜨겁고 뜨겁고 뜨겁기만 한 여름 햇살을 향한 본능적인 그리움에 대해서. 나는 장마가 계속 이어지는 탓에 달리기를 할 수 없다고 말했고, 그녀는 내가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다가 어느 결엔가 그녀가 내게 말했다. "맞아. 좋았어. 우리 참 좋았어. 그렇긴 하지만 우린 이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거야." 그 말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고, 또 슬프게 만들었다. 우선 '맞아'라는 말 때문에, 그 다음에는 '그렇긴 하지만'이라는 접속사 때문에. 맞아. 그렇긴 하지만. 맞아. 그렇긴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얼마간 나는, 예컨대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 주방 테이블 위에 식빵을 일렬로 쭉 늘어놓으면서, 혹은 도서관 앞 휴식공간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마치 나의 앞날처럼 불안하고 흐릿하기만 한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 말을 되뇌었다.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中

-

  호수 반대편까지 달려갔을 때는 온몸이 다 젖었고 운동화로는 물이 스며든 상태였지만, 그때부터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한 30분 정도 달렸을까. 문득 바람이 불어오는 서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거기 서쪽 하늘은 환해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은 검은빛이었고, 어떻게는 푸른빛이었고, 또 달리는 하얀빛이었는데, 그게 하도 인상적이어서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가만히 서서 한동안 그 풍경을 바라봤다. 하늘 전체를 뒤덮은 구름은 빠른 속도로 밝아지고 있었고, 지평선에서 한뼘 정도 위로는 날이 개리라는 걸 암시하는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비구름이, 그다음에는 바람이, 그리고 저녁이, 또 계절이, 그렇게 한 시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그 풍경 속에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았으므로 오히려 나는 숨이 편안해질 때까지, 바람이 젖은 내 몸을 차갑게 만들 때까지, 나뭇잎에 매달린 빗방울들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후두둑 떨어져 내릴 때까지, 그리하여 그 구름들 틈새로 푸르스름한 하늘이 엿보이게 될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中

문학

  지난 백년 동안 수없이 많은 동양인 이민자들이 그렇게 젖은 눈으로 금문교를 바라봤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금문교에는 수많은 이민자들의 목소리가 숨어 있다. 귀를 기울이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문학은 그런 목소리를 외부로 드러내는 작업이다. 정치적으로 봤을 때,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존재가 그 목소리로 증명된다. 반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들, 즉 입술이 없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대신해서 말한다는 점에서 문학은 본디부터 정치적이다. 금문교를 바라보면서 나는 문학이란 그들을 대신해 소리를 내어줌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입증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금문교가 있는 한, 누군가는 이민자들의 언어로 그들의 삶을 드러낼 것이다.
  치카노 문학이라는 것 역시 그런 식으로 형성됐을 것이다. 버클리에서 문학행위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까닭 역시 여기에는 아직도 말을 빼앗긴 존재들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한국에는 이제 더이상 말을 빼앗긴 존재가 없다는 뜻일까? 금문교를 바라보면 그런 의문이 자꾸든다.

<중략>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쓰게 될 때 우리가 쓸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혹시 한국에서 자꾸만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까닭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문학이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쓸 수 있을 때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써야만 하지 않을까?

- 김연수, <여행할 권리> 中



*
문학이란, 문학이란, 문학이란.....
킬킬대며 웃다가 멈칫, 마음이 숙연해지는,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는, 읽었던 문장을 다시 한번 꼼꼼히 되짚어 보게 되는 김연수의 수필집.

*
오랜만에 꽤 괜찮은 책을 만난 듯하여 배가 부르다.

공항

  여권에는 나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만 기재돼 있다. 이름과 국적과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 직장에서의 평판은 어떤지, 가족들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따위는 불필요하다. 초등학교 시절의 장래희망이나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가격 등도 필요없다. 출생증명서에 생물학적 사실관계를 밝히는 숫자만 기재돼 있는 것처럼 여권에도 오직 생물학적인 '나'에 대해서만 적혀 있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느 시공간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최소한의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우화처럼 느껴진다. 거기에는 치명적인 진실이 있다. 공항을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는 그저 여권에 적혀 있는 생물학적인 존재,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비행기를 타고 우리가 어디에 도착하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란 존재는 이름과 국적과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에 불과하다. 그 이상의 것들, 그러니까 사회적인 '나'는 등뒤에서 닫히는 출국장의 문 그 너머에 남겨져 있다.

-중략-

  두말할 나위 없이 삶은 영원하다. 다만 우리를 스쳐갈 뿐이다. 출국심사대에세 이제 드디어 내가 나 자신으로 돌아간다고, 그리하여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고 생각했다면, 입국심사대를 빠져나오면서부터는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느끼게 된다. 입국장의 문이 열리면 거기 수많은 사람들이 귀국하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친지이거나 친구이거나 동료들이다. 그들은 그저 저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누구인지 일깨워준다. 그들은 여행자를 찾는 순간, 미소를 짓거나 웃음을 터뜨린다. 극적으로 만나게 되어 눈물을 흘리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웃음으로 마무리된다.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가족을 보며 화를 내거나 우울증에 빠지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 혹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였던 나는 곧 그 사이의 어떤 것으로 바뀐다. 그 어떤 것은 공항을 빠져나가 바로 집으로 돌아간다. 늘 먹던 반찬으로 밥을 먹고 나면 거기가 집임을 실감할 것이다. 공항에 들어서기 전까지 일어났던 일들은 마치 꿈처럼 느껴진다. 그때는 완전히 타지사람이었고 여행자였다. 공항은 마치 생을 바꾸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며칠, 혹은 몇달이 지난 뒤에 우연히 여권을 보게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여권에 기재된 바로 그 사람이었을 때는 언제였을까. 물론 타지를 떠돌 때였다. 그럼 집에 있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영원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만간 그는 다시 공항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질문하고, 그리고 그 질문의 해답을 찾아 여행할 수 있을 뿐이다. 공항에서 우화는 반복된다. 결국 우리는 무례한 타지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덧없이 반복되는 존재일 뿐이다. 공황의 우화에 주제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리라.

  - 김연수, <여행할 권리 中>

상심에 이러지 말자

<전략>

  그날도 잠에서 덜 깬 멍청한 표정을 하고 화장실로 갔다. 집게로 창가 재떨이와 소변기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줍다가 '이 주의 금언'을 언뜻 봤다. 계속 청소하다가 뭔가 이상해서 다시 봤다. '논어'의 한 구절이었다.


즐거워하되 음란하지 말며 슬프되 상심에 이러지 말자
樂而不淫 哀而不傷



  오줌이 묻은 양철 집게를 들고 서서 나는 웃었다. 한참 동안 웃었다. 웃음을 그치고 담배꽁초를 줍는데 다시 배시시 웃음이 터져났다. '이러지 말자'가 아니라 '이르지 말자'라고 해야 옳았기 때문이었다. 자꾸만 내 머릿속으로는 공자님이 이른 아침 왜 가야만하는지도 모르고 가야만 하는 부대 화장실에서 집게로 담배꽁초를 줍는 내 소매를 붙잡고 '김 일병, 이러지 말자. 우리 아무리 슬프되 상심에 이러지 말자'라고 애원하는 광경이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공자님. 알겠습니다.
  보통의 남자들이 들으면 나를 향해 더이상 던질 비웃음이 없어 안타까워하겠지만, 방위병 생활을 하면서 난 참 많은 걸 배웠다.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기면 현역병이든 방위병이든, 심지어는 예비군이든 총알을 쏠 수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그때 처음 배웠다.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덤으로 배웠다.
  하지만 그 무엇도 그 잘못 쓴 금언만큼 큰 깨달음을 주지는 않았다. 삶의 길은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도 하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상심에 이러면 안된다. 슬프되 상심에 이러지 말자. 잘 살아보자.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中


+

얼마나 웃었는지, 이 글을 보고.
전철을 타고 가다가도 화장실 거울을 보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웃음이 났다.
슬픔에 이러지 말자, 슬픔에 이러지 말자. 이 문장만 생각하면 왜 그리도 웃음이 새어나오던지.
아, 얼마나 절묘한가 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화가 날 때, 분할 때, 짜증날 때면 이렇게 중얼거리는 나를 보곤한다.
슬픔에 이러지 말자. 짜증에 이러지 말자.

아, 정말. 짜증에 이러지 말자. 상심에 이러지 말자.

+

예전부터 좋아했지만, 요즘들어 더,
작가 김연수에게 반하다.
최근 출간한 '여행할 권리'도 기회되시면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