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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25 오 늘 14

오 늘

부여, 에 다녀왔다.
난생 처음 가본 곳.
서울부터 내 머리 위에 떠다니던 구름이 기어이 부여까지 쫓아왔나 보다.
종일 나를 따라다니는 구름들 구름들 구름들.
가는 순간까지 갈까말까를 망설이다, 느즈막히 버스를 타고(가만보면 늘 이런식이다. 어차피 갈 걸 왜 고민하는지)
더 느즈막히 도착한 부여는, 뭐랄까.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아무도 관심가져주지 않고, 어디서 나같은 여자애 하나 툭 끼어들어도 전혀 깨어지지 않는 그런 공기.
그런 심드렁함이 오히려 나는 반가웠다.
할랑할랑 걸으려고 했는데 평소 습관 버리지 못하야 또 시간 계속 들여다보고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면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빨리빨리빨리 걷고 있었다, 내가.
부소산성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 사실 조금 무서웠다.
한적하다 못해 을씬년스러운 숲길에 혼자 있자니
마치 자, 이렇게 멍석을 깔아놓아 줬으니 어디 생각이란 걸 해봐, 라고 명령 받은 것 처럼 좌불안석.
에라 모르겠다. 내처 걸었다.
웃긴 건 그렇게 걸으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는 것. 사람이 없다는 게, 무서웠다.
비가 듣기 시작할락말락한 부소산성에는 가끔 산책 나온 주민들이 있었고 그보다 자주 다람쥐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물 받은 엑시무스를 들고 왔는데 날씨가 이래서 어쩐다 하면서도 찍었는데 아마 안 나오겠지.
이런 저런 생각들을 끊임없이 하면서,
부소산성 올라 오기 전 편의점에서 샀던 투명우산을 질질 드르럭드르럭 끌면서,

간혹 지팡이 삼기도 하면서,
낙화암에 도착했다. 사실 별 느낌은 없었다.
그냥 걸어걸어 간 것일 뿐, 꼭 무엇을 봐야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그런데, 신기한 것이 저 멀리 보이는 백마강을 보고 있으니, 그렇게 혼자 보고 있으니, 마음이 이상해졌다는 것.
그리고 좀 무서웠다. 낙화암이라는 존재 자체가.
꽃잎처럼 떨어졌다는 궁녀들을 기린다는 그 곳 자체가, 그것을 기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무서웠다.

내둥 나 혼자였는데 주변이 소란스러워 돌아보니
어디서 뿅 나타났는지 대포 카메라를 든 남자와 여자가 시끄럽게 얘기를 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이 없어서 무서웠던 마음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저절로 인상이 찌푸러들었다. 좀 조용히 좀 하지.
바로 고란사로 향했다.
고란사로 가는 길은 여태 걸어왔던 길과는 다르게 경사가 져 있어서 내 저질 체력으로는 버거웠다.
아주 작은 경내(라고 하기도 민망한)에 들어서서 잠시 멍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결국 이렇게 혼자인 시간이 어색한 거 였다. 괜시리 혼자 머리를 긁적이며 헛기침을 해대다가
사실 삼배를 하고 싶었는데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아서
불상 앞에 놓인 함에 천원 짜리 한 장을 넣고 두 손을 모으는 것으로 대신했다.
무언가 간절해지는 마음. 무엇이 간절한지는 나도 모르겠다.

고란사 옆에는 배를 타고 입구까지 갈 수 있는 선착장이 있었지만, 잠시 망설이던 나는 왔던 길로 다시 돌아나가기로 했다.
올라가는 길이 힘들어, 오히려 그때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던 듯하다. 날씨도 습해서 걷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다.
부소산성을 다 돌아보려면 두 시간 정도 걸린다 하여 나는 이렇게 반만 보고 내려왔다.
너무 늦게 도착하여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목적지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보통 부여는 하루 동안 걸어다니며 보기 괜찮은 곳이라 하는데
앞서 말했듯 시간이 여의치 않았던 나는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궁남지 중 하나를 택해야 했고,
고민하다가 택시를 타고 석탑을 보러 갔다.

터만 남아있는 곳에 덩그러니 있을 석탑이 보고 싶었던 게다.
정림사지에는 흔적만 남아있는 절터와 박물관과 석탑이 있다.
박물관, 같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표를 끊으면서 기어이 박물관 안 볼 건데도 입장권 사야 하나요? 라고 소심하게 물었다.
대답은 뭐 그리 당연한 걸 새삼스레 묻느냐는 듣한 안내원의 표정으로 대신.

탑만 얼른 보고 궁남지에 가봐야지, 하며 들어갔는데 저 멀리 탑 주위를 까맣게 메우고 있는 사람들이라니!
부소산성 주차장에서 보았던 모 대학 관광버스의 주인공들인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박물관에 들어갔다. 슬슬 둘러보고 나오면 가고 없겠지 싶어서.
예상 외로 박물관은 깨끗하고 잘 꾸며져 있었다
가만 가만 걸어다니다가 나오니 학생들이 입구 쪽으로 나오고 있었다.
옳다구나, 탑 쪽으로 가는데 우르르 이동하는 학생들을 거스르며 걷는 꼴이 되어 버렸다.
나를 보는 그 아이들의 표정이라니.
저 여자 뭐야?
니들도 나이 들어봐라, 나는 괜히 혼자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의연한 척 하며 탑에게 갔다.

석탑은 정말 덩그러니 거기 놓여있었다.
기이했다.

석탑 주위로 발굴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그 모습 역시 기이했다.
시간이, 나만 빼고 흘러가는 것도 같았고,
내 시간과 그들의 시간이 따로인 것도 같았고,
석탑은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둥둥 떠있는 것도 같았고.

석탑을 한 바퀴 삥 돌았을 뿐인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가까이에서 올려다 보니 그때까지 나를 따라온 구름 아래에서 석탑이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그게 왜 그리도 새삼스러운지. 그리고 고마운지.
언제까지고 석탑은 거기 그렇게 있을 테니까, 언제고 그렇게 누군가를 내려다보고 있을 테니까.
무언가 안심이 되어서 씩씩하게 걸어나왔다. 거 참 이상하다.
거기에 석탑을 그렇게 남겨두고 궁남지를 향해 걸어갔다.
막차 시간은 다가오는데 걸어도 궁남지는 나오지 않아 어쩌나 망설이며 계속 걷다가
결국 지나가는 택시가 보이길래 집어 타고 터미널로 갔다.

표를 끊고 이십 분 정도 시간이 남아 차에서 먹을 김밥을 사고 터미널 근처 시장을 살짝 돌아보고 버스에 올랐다.
무언가를 계속 생각했는데 사실 정작 해야 할 생각들은 하지 못했다.
여행이란 게 무언가를 정리하거나 바람을 쐬거나 뭐 그래서 간다고들 하고,
나도 사실 그런 명목을 내세워서 가는 거긴 하지만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될수록 알겠다.
사실, 그냥 도망가고 싶은 거라고.
아주 가지도 못할 거면서, 그냥 거기서 도망치고 싶고, 그 시간을 마주하기 싫어서 라고.
그래서 나,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고스란히 다 안고 돌아왔다.
거기 탑 하나를 남겨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