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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05 공항

공항

  여권에는 나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만 기재돼 있다. 이름과 국적과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 직장에서의 평판은 어떤지, 가족들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따위는 불필요하다. 초등학교 시절의 장래희망이나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가격 등도 필요없다. 출생증명서에 생물학적 사실관계를 밝히는 숫자만 기재돼 있는 것처럼 여권에도 오직 생물학적인 '나'에 대해서만 적혀 있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느 시공간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최소한의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우화처럼 느껴진다. 거기에는 치명적인 진실이 있다. 공항을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는 그저 여권에 적혀 있는 생물학적인 존재,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비행기를 타고 우리가 어디에 도착하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란 존재는 이름과 국적과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에 불과하다. 그 이상의 것들, 그러니까 사회적인 '나'는 등뒤에서 닫히는 출국장의 문 그 너머에 남겨져 있다.

-중략-

  두말할 나위 없이 삶은 영원하다. 다만 우리를 스쳐갈 뿐이다. 출국심사대에세 이제 드디어 내가 나 자신으로 돌아간다고, 그리하여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고 생각했다면, 입국심사대를 빠져나오면서부터는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느끼게 된다. 입국장의 문이 열리면 거기 수많은 사람들이 귀국하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친지이거나 친구이거나 동료들이다. 그들은 그저 저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누구인지 일깨워준다. 그들은 여행자를 찾는 순간, 미소를 짓거나 웃음을 터뜨린다. 극적으로 만나게 되어 눈물을 흘리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웃음으로 마무리된다.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가족을 보며 화를 내거나 우울증에 빠지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 혹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였던 나는 곧 그 사이의 어떤 것으로 바뀐다. 그 어떤 것은 공항을 빠져나가 바로 집으로 돌아간다. 늘 먹던 반찬으로 밥을 먹고 나면 거기가 집임을 실감할 것이다. 공항에 들어서기 전까지 일어났던 일들은 마치 꿈처럼 느껴진다. 그때는 완전히 타지사람이었고 여행자였다. 공항은 마치 생을 바꾸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며칠, 혹은 몇달이 지난 뒤에 우연히 여권을 보게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여권에 기재된 바로 그 사람이었을 때는 언제였을까. 물론 타지를 떠돌 때였다. 그럼 집에 있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영원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만간 그는 다시 공항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질문하고, 그리고 그 질문의 해답을 찾아 여행할 수 있을 뿐이다. 공항에서 우화는 반복된다. 결국 우리는 무례한 타지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덧없이 반복되는 존재일 뿐이다. 공황의 우화에 주제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리라.

  - 김연수, <여행할 권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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